기타 칼럼(신문/기고문)

“뼈만 추리면 산다!”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를 지낸 수필가이자 영문학자인 고 장영희 교수는 소아마비를 이기고, 암과 싸우며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분이다. 그가 쓴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에 나오는 이야기다. 여섯 살짜리 조카가 뜰에서 놀다가 무언가에 걸려 넘어져 무릎을 다쳤단다. 아이의 울음소리에 맨발로 뛰쳐나간 동생은 아이를 껴안고 어쩔 줄 몰라 눈물을 글썽이고 동생 남편은 당황해서 연고 찾는다고 이리저리 서랍을 뒤지느라 분주했다. 그때 장 교수의 어머니가 차분하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야단법석 떨지 마라. 애들은 뼈만 추리면 산다.” 

어머니에게 들은 이 말이 평생 힘이 되었다고 회상하면서 장 교수는 이렇게 쓰고 있다. “성품이 온화한 어머니에게 어울리지 않는 과격한 말씀이다 싶어 슬며시 웃음이 났지만, 얼핏 그것이 어머니의 삶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운명이 뒤통수를 쳐서 살을 다 깎아 먹고 뼈만 남는다 해도 울지 말아라, 기본만 있으면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살이 아프다고 징징거리는 시간에 차라리 뼈나 제대로 추려라. 그게 살길이다. 그것은 삶에 대한 의연함과 용기, 당당함과 인내의 힘이자 바로 희망이 힘이다. 그게 바로 이제껏 질곡의 삶을 꿋꿋하게 아름답게 살아오신 어머니의 힘인 것이다. 그리고 그건 어쩌면 어머니가 무언으로 일생 내게 하신 말씀이었고 내가 성실하게 배운 은연중에 ‘내게 힘이 된 한마디 말’이었을 것이다.”

사람을 비롯한 대부분의 척추동물에게는 뼈라는 신체 조직이 있다. 뼈는 생각보다 단단하다. 같은 무게의 돌은 물론이고 쇠보다도 더 단단할 정도로 강하다. 뇌를 비롯한 중요한 장기는 모두 뼈의 보호를 받는다. 뼈가 있기에 곧게 설 수 있고, 뼈가 있기에 호흡하고, 뼈가 있기에 걷고, 뼈가 있기에 손을 움직인다. 

육신에만 뼈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도 뼈대가 있다. 이민자의 삶을 살기로 작정할 때 결단했던 마음가짐이 있다면 그것이 이민 생활의 뼈대였을 것이다. 혼인서약을 하며 배우자를 평생 아끼고 사랑하며 살겠다는 다짐이 있었다면 그것이야말로 부부 사이의 뼈대임이 틀림없다. 사업을 시작하며, 첫 직장에 출근하며 가졌던 마음가짐이 있었다면 그 또한 세상에 대한 책임이라는 뼈대였을 것이다. 아이를 낳으며 맡겨진 삶의 무게가 엄숙하게 다가왔다면 그것 또한 나에게 맡겨진 삶의 뼈대임이 분명하다. 

평안을 잃게 하는 세상의 현실, 불확실한 미래를 맞는 불안한 현실 속에서 삶의 자리가 무너지고, 호흡이 끊어지는 고통이 찾아올 때 먼저 해야 할 일은 뼈를 추리는 일이다. 그 뼈는 육신을 세우는 기준뿐 아니라, 삶을 잇는 기준이다. 

눈앞의 현실은 여전히 부산스럽다. 건강, 나이 듦, 사업, 자녀의 문제는 둘째치고라도 내 한 몸 건사하기조차 쉽지 않은 세상이다. 모두가 다 잘 사는 것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멀쩡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나름대로 고민하고, 근심하고, 씨름하며 버텨온 이민 생활 아닌가? 첫 아이 키우며 조금만 울어도 이거 ‘병원에 달려가야 하는 것 아닌가?’ 걱정하고, 젖을 많이 먹어도, 적게 먹어도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며 야단법석을 떠는 서툰 부모의 마음으로 세월과 맞서며 살아온 인생 아닌가? 

때로는 절망이 내 뼈를 녹이고, 뼈가 부서질 것 같은 배신의 칼을 맞을 때도,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터널을 지날 때도,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이 말만은 잊지 말자. “뼈만 추리면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