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칼럼(신문/기고문)

“꽤 잘살았다!” 

“꽤 잘살았다!” 이 말은 ‘침묵’이라는 소설로 유명한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遠藤周作ㆍ1923~1996)가 노년에 쓴 수필집 ‘회상’에서 한 말이다. 누구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회고록을 쓸 때쯤 되면 겸손해지고 정직해지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기에 “꽤 잘살았다!”는 엔도 슈사쿠 말이 조금은 교만하게 들린다. 그가 “꽤 잘살았다!”고 자신 있게 말했던 이유는 자신의 소설이 세계적인 작품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노벨 문학상 후보로 여러 번 거론된 이력 때문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던 작품들은 평생 그를 괴롭혔던 육체적 질병을 뼛속 깊이 받아들여 얻은 물질적, 정신적 결과물이라고 털어놓았던 그였다. 그런 그가 이순을 넘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꽤 잘살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아무리 어처구니없는 사건이나 사소한 추억조차도 쓸모없는 것은 없다. 그것은 오히려 귀중한 것을 그 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그는 자신 안에 존재하는 하나뿐이 ‘채널’에 만족하지 않고 백여 개의 ‘채널’을 부지런히 돌리며 이런저런 호기심을 채우면서 열심히 산 것도 “꽤 잘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라고 했다.

올 한해, 우리도 부지런히 살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는데, 바쁘게 달려왔는데, 성실히 살았는데, 정작 어떻게 살았냐고 물어보면 고작 한다는 말이 “겨우겨우” 아니면 “죽지 못해”라는 말이다. 조금 형편이 나아 보이는 사람들은 “그럭저럭”이라고 말하며 겸손한 척할 뿐이다. 

물론,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면 만족한 것보다 아쉬운 것이 훨씬 더 많아 보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 세월을 “잘못 산” 후회의 시간으로 지워버릴 필요는 없다. 엔도 슈사쿠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어떤 어처구니없는 사건이나 사소한 추억도 우리가 살아가는 데 교훈이 되고, 우리를 이끌어주는 길잡이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쓰라린 실패를 디딤돌 삼아 더 멋진 인생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2018년도 달력을 내건 지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마지막 남은 한 장만이 올 한해 남은 시간을 알리고 있다. 마지막 한 장 남은 달력은 거울이 되어 올 한해 열심히 살아온 우리의 삶을 비추며 왜 그렇게밖에 못 살았냐고 묻는듯하다. 그 거울 속에는 살아온 발자취가 남긴 후회와 작은 허물까지도 낱낱이 드러난다. 그 한 장마저 찢어버리든지, 눈을 감아버리든지, 그것도 아니면 숨어버려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래도 희망이 있다. 지난 시간의 허물과 후회를 새로운 시간의 충고로 받아들일 수 있는 담대함이 있다면 말이다. 삶의 위기와 고난만이 인도할 수 있는 멋진 인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올 한해 얼마나 많은 어처구니없는 사건과 실패가 있었는가? 잊어도 될만한 사소한 추억은 또 얼마나 많았는가? 그 실패와 추억 속에 담긴 귀중한 교훈을 찾아낼 수 있다면 잘 산 인생 아니겠는가? 그 깨달음을 의지해서 마지막 남은 달력 한 장과 작별하련다. “나도 꽤 잘살았다!”라는 말과 함께.

<LA중앙일보 칼럼, 2018년 12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