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시온의 소리 118 (마태복음 18장) 2025년 12월 17일

시온의 소리 118 (2025. 12. 17.)

* 찬송가 : 565장 ‘예수께로 가면’

* 오늘 읽을 성경 : 마태복음 18장

* 오늘의 말씀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마 18:21-22)

* 말씀 묵상

많은 사람이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이유를 ‘부담을 내려놓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며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 죄책감과 불안, 염려와 근심에서 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 평안한 삶을 살고 싶어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또 다른 부담이 생깁니다. 죄가 무엇인지 몰랐을 때는 죄를 지어도 크게 느끼지 못하던 죄책감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서 오히려 더 큰 부담감으로 다가옵니다.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부담, 기도해야 한다는 부담, 예배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부담,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부담, 봉사와 헌금에 대한 부담 등, 예수님을 믿고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오면서 우리는 새로운 부담들을 안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부담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임을 알면서도, 내 힘과 내 능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일을 하면 내가 손해를 보고, 자존심이 상하고, 체면이 깍일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부담은 우리를 짓누르는 세속적인 짐이 아니라, 믿음을 자라게 하는 거룩한 부담감입니다. 이 거룩한 부담감은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할수록, 그 뜻 앞에서 감당해야 할 부담감이 커지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갖는 가장 묵직한 부담감 중 하나가 ‘용서’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용서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용서에 대한 가르침이 이어집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묻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

베드로는 아마도 ‘일곱 번’이라는 숫자를 꽤 관대한 기준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유대 문화에서 완전함을 상징하는 숫자 일곱을 언급하며, 자신은 이미 충분히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뉘앙스를 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베드로의 기준을 훌쩍 넘어섭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2)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용서에는 횟수의 제한이 없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고, 약 6,000데나리온이 모여야 한 달란트가 됩니다. 노동자가 하루도 쉬지 않고 20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 한 달란트입니다.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은 무려 만 달란트의 빚을 졌습니다.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주인은 그와 그의 가족, 모든 소유를 팔아 갚으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절망 속에서 빚진 사람은 엎드려 자비를 구합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해 줍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만 달란트라는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그 사람이 밖으로 나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나자, 그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며 몰아붙입니다. 동료 역시 엎드려 시간을 달라 간청하지만, 그는 동료를 옥에 가두고 맙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주인은 그를 불러 엄중히 꾸짖습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마 18:32-33)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만 달란트의 빚을 진 사람은 바로 우리이며, 그 빚을 탕감해 주신 분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받은 용서에 비하면, 우리가 서로에게 져야 할 용서의 짐은 비교할 수 없이 작습니다.

용서는 내 의지와 결단만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이미 내가 받은 용서를 기억하고, 그 은혜에 응답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거룩한 부담감으로 다가오는 용서의 말씀은, 우리를 억누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닮아가게 하기 위한 복된 부르심입니다. 그 부르심에 순종하시는 이 하루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 오늘의 기도 

자비로우신 하나님,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탕감받고도 작은 상처와 억울함을 붙잡고 사는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미 받은 은혜를 기억하게 하시고, 그 은혜로 다른 이를 용서할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